
두봉 주교, 한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참 목자
6·25 전쟁 직후 한국에 파견되어 71년간 사목 활동을 해온 두봉 주교가 최근 선종했다. 향년 96세. 그의 삶은 한국 사회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나눈 여정이었다. 두봉 주교는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진정한 목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두봉 주교의 생애와 한국과의 인연
두봉 주교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21세에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한 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54년, 한국에 파견되기 전까지 그는 사제로서의 준비를 마쳤다. 한국에 도착한 두봉 주교는 대전 대흥동천주교회에서 10년간 보좌신부로서 사목하며 지역 사회와의 깊은 유대를 형성했다.
1969년, 그는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고 초대 안동교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21년간 교구를 이끌며 지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특히 농민과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다. 그의 사목 활동은 단순히 신앙 전파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헌신
두봉 주교는 ‘가난한 교회’를 표방하며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사목 활동을 펼쳤다. 1973년, 그는 경북 영주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을 개원하여, 차별받는 환자들을 돌보는 데 앞장섰다. 이는 그가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또한, 1978년에는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를 창립하여 농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이는 농민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불평등을 인식하고, 그들을 위해 행동에 나선 결과였다. 두봉 주교는 농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불의에 맞서는 모습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위기 속에서도 빛났던 용기
1979년 발생한 이른바 ‘오원춘 사건’은 두봉 주교의 용기를 잘 보여준다. 농민 오원춘씨가 불량 감자 종자로 인해 피해를 입자, 두봉 주교는 그를 지지하며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당시 정부는 두봉 주교에게 자진 출국 명령을 내릴 정도로 그 사건은 심각한 상황으로 번졌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사명에 대한 신념을 지키며,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봉 주교의 마지막 날들
두봉 주교는 2019년 특별 귀화자로 선정되어 한국과 프랑스 이중 국적자가 되었다. 최근에도 그는 경북 의성의 한 공소에서 신자들을 위해 미사를 주례하고 고해성사를 하며,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을 이어갔다.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신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에게 희망과 힘을 주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또한, 그는 2022년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한국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웃을 돕는 한국인의 미덕을 강조하며,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두봉 주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한국 사회의 저력과 따뜻함을 전하며,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었다.
정리하며
두봉 주교의 삶은 단순한 신앙의 길을 넘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사목 활동은 한국 사회의 아픔을 보듬고, 희망을 전달하는 여정이었다. 그의 유산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기억될 것이며, 그의 정신은 계속해서 이어져 나갈 것이다.